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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식의 정도전 이야기[3] 정도전의 출생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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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9회 작성일 23-05-1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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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5∼6학년 때이니까 1959년∼60년으로 기억된다. 여름이면 또래들끼리 구성산(龜城山) 서쪽 동구대(東龜臺) 아래 쪽박소에 가서 물놀이를 하고 놀았는데 그때마다 삼판서고택 앞을 지나 다녔다.

당시는 그냥 허름한 기와집일 뿐 삼판서고택인줄은 몰랐다. 그 후 2008년 현 위치로 이전 복원된 후 삼판서고택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삼판서고택이 ‘정도전의 생가’라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삼판서고택 앞에는 표지판 조차도 없어 아쉽다.

지금 삼판서고택은 정도전의 생가로, 민본사상이 싹튼 곳으로, 민본의 본향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정도전 출생의 진실과 허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정도전이 태어날 당시 대부분의 산모는 친정으로 가서 출산하는 것이 일반화된 관습이었다. 이러한 풍습은 지금과 같이 의술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보편화되지 않았던 1960년대 말까지 성행됐다.

따라서 정도전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당시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친정에서 출산한 것으로 가정한다면 정도전은 영주 외가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입증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영주지역의 통설은 본가인 삼판서고택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정도전이 유소년 시절 기초학문에 입문한 기록이 그의 시 「제고암도인시권(題古巖道人詩卷)」에 나타나고 있다.

고암도인은 예전의 나의 스승 최병부(崔兵部, 최림)의 아우다. 내가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 고암은 아직 글을 읽고 있었다. 선생께서 작고하신 후에 헤어졌는데 이제 20여 년 만에 도은(陶隱, 李崇仁)의 재실에서 만났다. 그런데 고암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있으므로 탄식한 나머지 그에게 시를 써준다.

최림은 1353년 정동행시 향시에서 이색과 함께 급제하였고, 1356년 병부의 직으로 신년 축하사절로 원경에 갔다가 귀환 중 요하(遼河)에서 도적을 만나 죽었다. 정도전은 최림에게 배웠고 최림이 죽은 후에 고암과 헤어진지 20여 년이 되었다 하였으므로, 최림의 동생 고암을 만난 것은 1376년이다.

정도전이 최림에게 배운 것은 최림이 급제하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도전은 1352년 10여 세 이전에 최림에게 기초학문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최림의 본가와 처가는 영주이고 처부는 진중길(秦中吉)이다. 따라서 정도전은 영주 본가에서 유소년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영주는 내고향’이란 정도전의 시가 있다.

삼봉이 개경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공양왕 어느 해 봄날, 정부령 정홍(鄭洪, ?-1420)이 경상도안렴사로 떠난다고 하자, 그를 전송하면서 “나를 위해 고향의 유민(遺民)들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며 노자(路資) 대신 지어준 시(詩)다.

萬古鷄林碧(만고계림벽) 만년을 푸르리라 저 계림이여,
風流代有人(풍류대유인) 풍류를 대대로 잇는 사람이 있네.
星軺 辭白日(성초사백일) 성초(星軺,수레)로 날이 밝아 하직 올리니,
玉節映靑春(옥절앙청춘) 옥절은 푸른 봄에 비추이누나.
交契通家舊(교계통가구) 교분은 예부터 집안이 통하는 벗이었지만,
離愁此地新(이수차지신) 이곳에선 이별의 시름 새롭네.
龜山桑梓邑(구산상재읍) 구산(龜山)은 내 고향(桑梓) 고을이 거니,
爲我訪遺人(위아방유인) 나를 위해 유민들을 찾아봐 주게.

삼봉은 위의 시 결구(結句)에서 “구산은 내 고향의 고을이니(龜山桑梓邑)”라고 하였다. 구산은 구성산(龜城山)의 줄임말이다.

출처 : 영주시민신문(http://www.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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