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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식의 정도전 이야기[4] 정도전의 ‘영주는 내 고향’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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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7회 작성일 23-05-1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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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삼봉의 ‘영주는 내고향’ 시에서 “구산은 내 고향의 고을이거니(龜山桑梓邑)”라고 했다. 여기 나오는 구산(龜山)은 영주 시내 중심부에 있는 구성산(龜城山)의 줄인 말이다. 그리고 상재(桑梓)는 부조(父祖)의 고기(古基)를 말하는데, 즉 고향을 뜻한다.

또 『삼봉집』에 보면 경신년(1380) 영주에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피구(避寇), 도적을 피하다’란 시에 ‘상재(桑梓)’가 등장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避寇難吾土(피구난오토) 도적을 피하여 내 땅을 떠나/ 家走異鄕(휴가주이향) 가솔을 이끌고 타향으로 내달리니/ 荊榛行木蔽(형진행목폐) 가시넝쿨이 길을 막아 앞을 가리니/ 桑梓耿難望(상재경난망) 상재는 눈에 선해 잊기 어렵네/ 世險憐兒少(세험련아소) 세상이 험란하니 어린아이 가엽고/ 家貧仗友良(가빈장우랑) 집마저 가난하니 어진 벗에 의지할 수밖에/ 乾坤空自闊(건곤공자활) 천지는 부질없이 넓기만 하니/ 獨立興蒼茫(독립흥창망) 내 흥취 아득아득 홀로 섰노라.

위의 첫 번째 연 오토(吾土)는 ‘내 고향’이란 말이다. 다음 연의 이향(異鄕)이란 말은 다른 고을이란 말이나 여기서는 타향이라는 뜻으로 표현한 것이며, 이향이나 타향의 반대말은 고향이다. 네 번째 연의 첫머리의 상재(桑梓)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변(小弁)에 “부모가 심은 뽕나무와 자작나무(가래나무)도 공경한다. [維桑興梓(유상흥재) 心恭敬止(심공경지)]”라고 한데서 빌려온 말이다. 여러 대의 조상 무덤이 있는 고향마을, 곧 대대로 살아온 고향 집을 가리킨다.

삼봉은 이 시에서 갑자기 왜구가 영주로 쳐들어오자 황급히 가족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타향으로 가야 하는 참담한 심경을 노래하고 있다. 삼봉이 이때 가족들과 왜구를 피해 찾아간 곳은 군영(軍營)이 있는 안동대도호부였다. 그곳에 있던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소유인 읍성 옆에 있던 작은 누옥에 몸을 의탁하였다.

또 『삼봉집』에 삼봉이 영주와 안동을 왕래할 때 지은 시가 있어 소개한다.

제목은 ‘題映湖樓 영호루에 제하다’이다.

飛龍在天弄明珠(비룡재천농명주) 나는 용이 하늘에 있어 밝은 구슬 희룡하다/ 遙落永嘉湖上樓(요락영가호상루) 안동이라 영호루에 멀리 떨어지니/ 夜賞不須勤秉燭(야상불수근병촉) 밤에는 구태여 촛불 밝힐 것 없네/ 神光萬丈射汀洲(신광만장사정주) 만길 신광 온 고을에 비치는 걸.

이 시는 공민왕이 1360년 홍건족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파천하였다가 1362년 개경으로 돌아와 영호루 편액을 금방(金榜)으로 써서 하사하였다. 그 후 왕은 시해당하여 죽고 삼봉은 왕의 친명정책을 계승하려다 권신에게 미움을 받아 유배당했다.

종편(從便)이 허락되어 정처 없는 유랑 생활 중 이곳 안동에 동년우(同年友) 척약제가 살고 있어 몸을 의지하게 되었다. 1380년 가을 어느 날 영호루에 올라 편액을 바라보면서 공을 총애하던 공민왕을 그리워하며 이 시를 읊었다.

출처 : 영주시민신문(http://www.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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